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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고택(芝山故宅)

창녕조씨 지산종택(昌寧曺氏 芝山宗宅)

50.8x141.3x9 / 해서(楷書)MO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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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료명 지산고택(芝山故宅)
  • 글자체 해서(楷書)
  • 크기 50.8x141.3x9
  • 건물명 지산고택(芝山故宅)
  • 공간명 창녕조씨 지산종택(昌寧曺氏 芝山宗宅)
  • 서예가
  • 위치정보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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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산고택(芝山故宅)

지산고택(芝山故宅)


지산고택(芝山故宅)은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 신광리에 있는 지산(芝山) 조호익(曺好益, 1545~1609)의 종택이다. ‘지산’은 조호익이 자리 잡은 오지산(五芝山) 아래 지산촌(芝山村)의 이름을 딴 것이다. 조호익은 이곳에 집은 지은 다음 당(堂)을 졸수당(拙修堂), 서재를 완여재(翫如齋), 정자를 망회정(忘懷亭)이라고 편액하였다. 현재 지산고택은 조호익의 유지를 받아 도잠서원의 옛 집터와 이웃한 곳에 지은 집이다. 그래서 지산고택은 ‘옛 고(古)’ 자를 쓰지 않고 ‘연고 고(故)’ 자를 쓴다. 편액의 글씨는 작자 미상의 해서체이다.

네 글자 간의 관계가 상호 긴밀하고 멋스럽게 구성되었다. 시작하는 필획 부분은 둥글고 부드러우면서도 마무리 처리는 네 글자 모두 뽑아내었다. 거두어 마무리하는 법이 절제미가 있다면 뽑아낸 필획은 발산하는 기세가 있다. 글씨에서의 기세란 창공에 고송일지(孤松一枝)와 같은 것이라 했다. 고송일지와도 같은 필획 끄트머리의 기세가 이 편액에서는 서로 엇갈려 화면을 역동적으로 가른다. 그러나 서로 묘하게 부딪치지 않고 공간을 여유롭게 유영하면서도 퍽 안정적이다. 만약 여기에 한 글자 정도는 뽑아내지 않고 거두어들여 마무리 하였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서예가 恒白 박덕준)

창녕조씨 지산종택(昌寧曺氏 芝山宗宅) 소개


경상북도 영천시 대창면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당시에 이 지역에 큰 창고가 있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다. 원래 이 지역은 모래가 많아 그 전에는 모사면이라 불렀으며, 20세기에 접어들어 창수면의 일부와 흥해군 북안면의 일부가 모사면과 합쳐져 대창면이 신설되었다. 특히 지산고택이 있는 신광리는 개상동, 효일동, 지일동을 합친 마을로 ‘새로 빛나라’라는 뜻의 ‘신광(新光)’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또 조호익이 후학을 양성하며 기거하던 곳에 건립된 도잠서원이 위치한 용호리는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용교(龍橋)’와 ‘송호(松湖)’의 이름을 딴 것이라고 한다.

창녕조씨(昌寧曺氏)는 시조가 조계룡(曺繼龍)이다. 창녕조씨가 영천에 자리 잡은 때는 고려 말 조신충(曺信忠)이 여말선초의 혼란기 속에서 고려에 충절을 지키기 위해 영천에 은거한 것에서 시작했다. 조신충은 조선 개국을 전후해 고려에 대한 의리와 실천을 내새워 새로 개국한 조선에서 벼슬을 하지 않은 학자로 손꼽힌다. 그는 1383년 문과에 급제한 뒤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호정 하륜 등과 교유했다. 그러던 중 우왕과 창왕이 연이어 폐위되자 관직에 대해 단념하고 은거할 것을 결심, 개경과 멀리 떨어진 처향인 영천의 창수촌 마단 마을에 은거했다. 조신충의 부인 영천최씨는 판서 최중연의 딸이다. 조호익의 집안인 창녕조씨 지산문중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공을 세운 호수 정세아(1535~1612)의 집안인 영일 정씨 문중과 함께 ‘남조북정(南曺北鄭)’이라 불릴 만큼 영천 지역의 유력한 가문으로 손꼽힌다.

조신충의 조호익의 7대조이다. 조호익의 증조부 조치우는 영천에서 창원으로 이거했다. 그의 부인 창원박씨(昌原朴氏)가 친정의 제사가 끊긴다고 우려해 조치우가 마침내 창원 지개동으로 이사를 간 것이다. 조호익의 부친은 조윤신(曺允愼, 1511~1571)이고 모친은 인동장씨(仁同張氏) 장중우(張仲羽)의 딸이다. 조호익은 창원 지개동에서 태어났다.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조호익은 10세 형 조광익(曺光益)과 함께 주세붕(周世鵬)의 아들인 주박(周博)에게 수학했다. 1560년 생원·진사시에 합격했고, 이듬해 이황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했다. 1575년 경상도도사 최황(崔滉)이 부임해 군적(軍籍) 정리를 감독하는 임무를 조호익에게 맡겼는데, 당시 모친상과 병으로 인해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자 최황이 그를 토호(土豪)로써 명령에 항거한다고 상주(上奏)하여 평안도 강동현에 유배되었다. 조호익은 이곳에서 17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면서 학문에 정진하고 후진을 양성하여 관서 지방에 학풍을 진작시켰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류성룡의 요청으로 유배에서 풀려나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조호익은 이에 문인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중화·상원 지역에서 크게 활약한 공으로 품계가 통정대부에 오르고 호군에 임명되었다. 1593년 명나라 군대를 따라 평양성을 공격해 큰 전과를 올렸다. 그 뒤 대구부사, 성주목사, 안주목사, 성천부사 등을 역임하고, 1597년 정주목사가 되었으나 병으로 사직하고 영천의 도천으로 내려왔다. 1604년 영천 지산촌으로 이주해 서재와 정자 등을 세우고 저술 및 후진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것이 영천에 지산문중이 생겨난 발로이며, 조호익이 이곳에 자리를 잡은 뒤로 그의 자손들은 단 한 차례도 거주지를 옮기지 않고 살아왔다고 한다.

조호익의 초취부인은 김해허씨(金海許氏) 허자(許磁)의 손녀이고, 후취부인은 거창신씨(居昌愼氏) 신복진(愼復振)의 딸인데, 모두 자식을 얻지 못해 조호익의 중형(仲兄) 조희익(曺希益)의 아들 조이수(曺以需)를 후사로 삼았다. 저술로 『지산집』·『심경질의고오心經質疑考誤』·『가례고증家禮考證』·『주역석해周易釋解』·『역상추설易象推說』·『논위학지요論爲學之要』·『이기유석등변理氣儒釋等辨』·『대학동자문답大學童子問答』·『소황이두시가구주蘇黃李杜詩家句註』 등이 있다.

지산고택은 평평한 대지에 ㅡ자형 안채, ㄴ자형 사랑채, ㅡ자형 고방채가 트인 ㅁ자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집의 전면과 좌측면으로 토석담을 둘렀으며, 살림집 우측 뒤의 높은 곳에 사당이 자리하고 있다. 대문을 통해 들어가 마주하게 되는 사랑채는 정면 4칸, 측면 4칸의 ㄱ자 맞배지붕이다. 막돌허튼층쌓기 기단의 바닥을 흙바닥으로 자연석 초석을 놓았으며, ㄱ자 외부 쪽 전면과 측면에는 둥근기둥을 사용했다. 대청의 상부는 3량가이다. 사랑마루는 전면 3칸이고 우측에 중사랑방 한 칸과 부엌이 좌우측 뒤쪽이고 ㄱ자로 꺾여 큰사랑방, 책방, 아궁이 등이 이어져 있다. 사랑채를 돌아 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 5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을 한 안채가 있다. 방앗간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고방, 방, 방앗간의 순서로 평면이 구성되어 있으며, 원래는 초가지붕이었으나 근래 기와로 바꾸었다고 한다. 조호익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산고택은 189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는데, 2010년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39호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 조호익, 『지산집』.
  • 박학래, 『학문과 충절이 어우러진, 영천 지산 조호익 종가』, 예문서원, 2015.
  • 한국국학진흥원 자료부, 『창녕조씨 지산종택 』, 한국국학진흥원, 2017.
  • 디지털영천문화대전(http://yeongcheon.grandculture.net/)